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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게임 이야기

언더테일 - 아무도 죽을 필요 없는 상냥한

현대 게임 산업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실제와 같은 더 실제 같은 게임과 발전된 VR 기술은 조금만 더 지나면 진정한 리얼리티를 실현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실제로도 디비전과 같은 게임을 보면 뉴욕 거리 한복판을 걷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게임 기술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게임 개발비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금에 따라 만들 수 있는 게임의 한계가 생기고 심지어는 투자 지침에 따라 미완성의 게임이 늘어납니다. 인디게임과 퍼블리싱 게임의 격차도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이 기술적 차이를 억누르는 감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분명 도트 그래픽은 구시대의 유산입니다. 과거 게임에 제공되는 용량은 터무니없이 적었고 그렇기에 그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트는 화면에 표시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획의 크기였으니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런 도트 그래픽 게임들을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사각형들이 채우지 못하는 나머지 부분을 사람들이 상상력으로 충분히 보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점들은 지금의 화려한 세계관들과는 다른 감성을 지닙니다. 큰 사각형들로 모든 매력적인 특징을 담아내야 하는 도트는 어떻게 보면 게임계의 캐리커처 기술 중 하나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며 그 자체가 예술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성을 통해 자신의 매력을 뽐내는 인디게임들의 정점에 언더테일이 있습니다.

확언할 수 있습니다. 언더테일은 일반적인 인디게임과는 색다릅니다. 캐릭터들의 디자인부터 이 게임의 독창성을 보여줍니다. 주인공과 괴물들 어느 하나 그 성격들만큼이나 통일성 있는 디자인은 아닙니다. 같은 형제인 파피루스와 샌즈만 보더라도 하나도 비슷한 모습이 없습니다. 모든 캐릭터의 모습은 제멋대로고 마치 잡지책에 있는 그래픽들을 오려서 한 군데에 모아둔 듯한 모습마저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게임의 모든 디자인들은 예술성 있는 모자이크가 되어버렸습니다.

조잡한듯한 게임 인터페이스도 진행을 하노라면 감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제4의 벽을 쉽게 깨버리는 게임답게 이 게임에서 세이브와 로드는 포기하지 않고 재도전한다는 의미일 뿐이며, 실력이 좋아서 바로 넘어가는 것도 좋겠지만 반대로 끊임없이 세이브와 로드를 했다 하더라도 나쁠 것은 없습니다. 다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나아가면 될 뿐이죠. 모든 인과들은 실질적인 게임에서의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예전에 바이오 쇼크의 엔딩을 보면서 이런 인과의 살벌함을 느끼는 데, 언더테일의 인과율은 여타 게임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것은 제작자 본인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 지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게임에 등장하는 경험치와 그로 인해 레벨을 올려 높이게 되는 체력은 주인공과 게이머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실제로 이러한 시스템을 제외하고서도 많은 부분은 게이머에게 끊임없이 도덕적인 선택과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주게 됩니다. 코미디언이 꿈인 괴물을 죽이고 난 게이머가 도달하는 바에서 만나게 되는 NPC는 코미디언이 되겠다고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이며, 연구소 지하에서 만나게 되는 괴물들은 여태껏 사이좋게 지냈던 괴물들의 가족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그저 배가 고파 주인공이 가진 감자칩의 냄새에 이끌려 다가왔을 뿐이었습니다.

게임에서의 주인공은 이러한 상처를 입어갈 때마다 차라에게 잠식되어 갑니다. 결국 모든 괴물들이 죽이고 나면 프리스크의 몸에는 차라만이 남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려는 게이머에게 차라는 제안을 합니다. 그리고 큰 대가를 치르고 처음으로 돌아와도,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올바른 결과를 향해 돌아온다 하더라도 상황은 바뀌지 않습니다. 차라는 프리스크가 아닌 게이머에게 직접 이야기합니다. 결과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러나 반대로 이 게임은 상냥함을 잃지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웃으면서 할 수 있는 면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주요 캐릭터 외의 엑스트라 역시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게이머는 이를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이들을 인정해 주면서 인간에 대한 불신을 없애고 반대로 이들과 친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모두를 죽이지 않은 경우 극명하게 그 보상이 돌아옵니다. 게다가 애초에 그 괴물들은 주인공과 싸울 의지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최초에 적대적인 케이스가 언다인인데 그녀가 적대적인 이유는 아스고어의 모습을 직접 지켜보았기 때문이죠.

파피루스와의 데이트, 언다인과의 요리교실 그리고 알피스와의 데이트를 거치면서 그들의 순수함을 볼 수 있습니다. 게임은 누군가를 한 번도 죽이지 않으면서 완료될 수 있습니다. 아스고어와의 마지막 싸움에서도 자비를 베풀 여지는 실 날만큼이라도 남아있으며, 심지어 플라워와의 싸움은 그렇게 배신에 농락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풀 기회가 있습니다. 이는 플라워가 불쌍해서도 주인공이 한없이 착해서가 아닙니다. 프로그가 이야기했던 자비가 가능하지 않더라도 자비를 해야 할 순간이 있다는 것을 토리엘부터 아스고어로 이어지는 싸움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심지어 플라워마저 포용할 수 있는 결말은 처음부터 게임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귀를 기울이고 살펴보면 언젠간 자비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을 말이죠. 언더테일의 모든 이야기가 소름 끼치면서도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항상 게임에서는 물리쳐야 하는 적이 존재하고 그 적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이야기는 있지만 여기에서의 괴물은 처음부터 물리쳐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이해를 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대상입니다. 인간에게 졌고 왕의 두 아들을 잃어 인간에 대한 불신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 그렇기에 이야기는 빛나는 거라 생각됩니다.

스팀의 그린라이트 그리고 엑스박스의 ID@XBOX 등 여러 가지 도구를 통해 인디게임은 그나마 숨통을 트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그건 소수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과연 퍼블리싱 게임 중에 그 성공한 인디게임의 스토리만큼을 채웠음에도 실패한 경우가 있었는지를 말이죠. 결국 그 이야기를 담는 방법의 문제일 뿐이지 좋은 이야기와 콘텐츠에는 좋은 평가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 콘텐츠를 생각해 내지 못한 것뿐이죠. 애초에 인디게임에는 인디게임 나름의 잣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게임은 종합 엔터테인먼트라고도 합니다. 언더테일, 투더문 같은 게임들의 점들은 분명 매끄럽지 않고 각이 져 있습니다. 그러나 촌스럽지는 않죠. OST는 따로 놓고 보더라도 오래 지나도 들을 수 있는 음악입니다. 스토리는 말할 것도 없죠. 인디게임이 가능성이 있고 없고는 애초에 퍼블리셔의 규모나 게임 기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인디게임은 수많은 돌들 중에 하나의 원석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게임 개발비가 많이 들어서, 혹은 퍼블리셔를 못 만나서, 또는 최근의 양상에 맞추기 위한 기술을 갖추지 못해서라도 보기엔 언더테일이나 다른 유명한 인디게임들이 어느 하나에 대해서 우위에 있진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게임은 종합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엔터테인먼트라는 간판을 단 장르에서 이야기가 없다면, 신념이 없다면 응답하라 1886과 같은 단순 벤치용 게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